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부동 전투 (문단 편집) ===== 홀소 나루터의 교전 ===== 제3대대는 대대 전투지휘소를 석적 국민학교에 두고 3개 중대를 하천선에 설치하여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며 대대수색대를 제1대대와의 전투지경선에 투입하여 적으로 하여금 측방을 노리지 못하게 하였다. 제9중대는 제3대대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으며 중대 정면에 홀소 나루터가 있으며 대안에는 과수원이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적은 작일 8월 4일에는 피난민을 도하시킬 때까지는 조용하더니 8월 5일에 이르러 돌연 전차와 야포 및 120mm 박격포를 방렬하여 포격을 개시하였다. 갑작스럽게 적의 활동이 증가되면서 대대장은 제9중대장에게 적정을, 특히 전차의 배치상황을 수색하라고 지시하여 제3소대장 대리 박선문 이등상사는 이 임무를 부여받고 22시에 소대원 6명과 함께 대안의 복숭아 밭으로 침투하여 위장되어 있는 전차 4~5대를 발견하고 제방 뒤에는 적 약 1개 중대 병력이 집결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8월 6일 01시에 적은 도하를 개시하였으나 30여 분간 교전하여 9중대는 격퇴시켰다. 잠시 후 수색대가 도착하면서 대대는 적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곧 적의 공격이 개시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보고를 받은 지 약 1시간 후 8월 6일 03시에 녹색 신호탄이 발사되는 것과 동시에 적의 공격이 개시되어 제9중대 정면으로 다수의 적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제9중대의 맹렬한 사격과 우일선의 제11중대의 지원으로 탄막이 형성되면서 적은 결국 철수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의 적은 04시에 단숨에 154고지까지 진출하여 아방에 혼란을 주었는데, 다행히 적은 오리동 방면으로 도주하여 안정을 되찾았다. 날이 밝고 보니 모래밭 일대에 적의 시체가 즐비했으며 적의 부상병을 포로로 잡고 중기관총 몇 정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대안의 적이 계속해서 포격을 하였으므로 구체적인 전과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날 밤 23시에 적은 이번에는 제11중대 방면에 출현하여 돌파를 시도하였는데, 이번에는 중대의 측방을 노려 중대를 돌파하고 369고지까지 진출하면서 제9중대의 후방을 교란하고 큰 타격을 주어 제11중대는 점차 분산되어 갔다. 이때 제9중대 2소대장 박종순 소위는 침착하게 제3분대를 노출된 측방으로 투입에 적을 저지하는 데에 안간힘을 썼다. 동이 트고 대대는 제11중대의 잔여 병력을 수용하고 369고지를 탈환하고자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이때 제12중대장은 석적 국민학교 뒷편에서 81mm 박격포 사격을 지휘하다가 적의 기관총탄으로 온 몸이 벌집이 되다시피하여 쓰러졌으니 그는 곧 다부동 전투에서의 첫 중대장 전사자였다. 다행히 대대수색대는 369고지를 재차 공격 시도하여 2회의 공격 끝에 간신히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적은 3회의 걸친 공격에서 다수의 병력을 희생한 대가로써 아군이 방어배치 상황과 더불어 양점을 파악하여 결과적으로 아군의 정세를 살피는 데에 성공하였으므로 결국 아군은 적을 저지하였으나 저지하지 못한 셈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